나를 허물 건가, 신을 허물 건가
신전 귀퉁이에 있는 사데 교회의 유적은 초라해 보였다. 웅장한 신전과 조촐한 교회의 모습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바울 당시에도 이런 풍경은 꽤 흔했을 터이다.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전도 여정은 사실 그리스 신들과 로마 신들의 틈새에 ‘예수의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을 믿는 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설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리스의 신을 믿는 이가 바울에게 물었다. “이 많은 신들의 석상 중 당신이 믿는 신은 어느 신이오?” 주위를 둘러보던 바울은 석상을 하나 발견했다. 그 아래 ‘이름 없는 신’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바울은 그 석상을 가리키며 “내가 말하는 신은 바로 저 ‘이름 없는 신’이오”라고 답했다.
초대 교회 유적지에는 들꽃이 곳곳에서 한들거렸다. 그 꽃들은 이름을 갖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랬다. 신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이미 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신에게 이름을 붙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이름 없는 신’을 향해 이름을 붙인다. 나의 바람, 나의 욕망, 나의 가짐을 ‘기도’란 이름으로 포장한 채 신에게 들이댄다. “하나님! 당신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면서 말이다.
젊은 시절, 요한은 욕심이 많았다. 그는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예수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들어주십시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 중 하나는 주의 왼편에, 또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명의 사도들은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에게 이렇게 답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요한과 야고보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때만 해도 요한은 몰랐을 터이다. 예수가 받을 잔이 어떤 잔인지 말이다. 그건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예수조차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기도했던 ‘십자가 죽음’이었다. 어둑어둑한 요한의 동굴, 거기서 눈을 감았다. 대체 뭘까. ‘예수가 마셨던 잔’ ‘십자가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 2000년 전, 사도 요한 역시 이 동굴에 머물며 그걸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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