默想, 기도

면형무아(麵形無我)

돌체김 2011. 10. 22. 07:25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루카 7,31-­35)

▶ 묵상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창립자이신 방유룡(무아 안드레아) 신부님은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찬 분이셨습니다. 무아 안드레아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완덕이 무엇이며, 그 절정이 어디뇨? 완덕은 점성(點性)에서 시작하고, 그 절정은 면형무아에 있도다. 길이·넓이·깊이·높이가 점에서 시작하였고 자연계에서는 마지막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나왔도다. 무는 점성을 지나가는 정신이니 이는 면형이로다. 면형에 계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무화하시고 텅 비우셨다. 이는 시공을 넘어간 정신이요 완덕의 절정이로다. 면형은 자연을 넘어간 초자연이니, 그는 곧 하느님이시도다. 임이 면형과 하나가 되심은 무아와 하나가 되심이기에 실상 면형은 무요, 전능으로 드러난 무요, 무는 자아를 없앤 무아요, 무아는 면형과 하나니 임과 면형이 떠날 수 없는 인연이라기에 나는 울었나이다. 완덕의 비결은 면형이요, 그 성공의 비결은 점성이로다. 슬기는 이것을 알아듣고 범사에 정밀(精密)하여 미소(微小)함에서 정밀함으로 만사형통하는도다. 초목의 생명은 뿌리에 있어서 뿌리 없이 살 수 없고 뿌리 내릴 준비가 없으면 싹도 틀 수 없도다. 위대한 일은 무엇이며, 복된 삶은 무엇인고. 주님의 눈에 들고 그 사랑 속에 삶이로다. 인품이 뛰어난 이를 위대하다 하고, 물질이 풍부한 이를 복되다 하나 아무리 비천한 이라도 주님의 뜻에 맞는 이가 성인(聖人)이요, 제아무리 위대한 이라도 성의(聖意)에 불합(不合)하면 죄인이로다”(영가 80 중에서).

무아 안드레아 신부님은 자아를 없앤 무 안에 하느님께서 임하심을 면형의 신비로 깨달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날 밀떡의 형상 안에 당신 모습을 감추고 계신, 초자연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 신비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완덕의 절정인 면형무아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아를 내세우고, 자신의 힘을 키워서 자아를 완성하려 애쓰지만 실상은 자신을 비우고, 무가 되려고 노력할 때 그 무의 자리에 하느님이 임하심을 면형무아의 신비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나를 버리고 주님께서 내 안에 임하시어 나를 통해 주님이 드러나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 김경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기독교 정신적 철학 - 속죄, 구원, 부활, 영생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자신을 비우(부수고)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품자

 

면형무아(麵形無我)란 성체 축성으로 밀떡의 실체는 없어지고 그 형상만 남은 무(無)인 면형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면형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되듯이 내 인간적인 본성이 없어진 무아(無我)에 하느님께서 오시어 하느님과 내가 하나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면형(麵形)은 바로 밀떡의 형상으로서 "예수님께서 천주시면서 비하(卑下)하시고 비하(卑下)하시어 무화(無化)하신 것으로서의 성체를 말한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가야하고, 그것은 바로 육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성체적인 삶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매일 매순간을 사는 삶이 바로 면형무아의 영성이라 하겠다.

이 면형무아(麵形無我)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으니 바로 점성정신(點性情神)으로 일상의 매순간을 성화(聖化)하면서 침묵 속의 여정을 걸어 마침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사랑으로 사는 대월생활(對越生活)을 하는 것이다.


완덕오계(完德五誡)는 구체적인 침묵의 길이다.
일계, 분심잡념(分心雜念)을 물리치고
이계, 사욕(邪慾)을 억제하고
삼계, 용모(容貌)에 명랑과 평화와 미소를 띄우고
언사(言辭)에 불만과 감정을 발하지 말고
태도(態度)에 단정하고 예모답고 자연스럽게 하고
사계, 양심불을 밝히고
오계,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聖意)를 따를 지니라.

분심잡념(分心雜念)은 우리 정신과 마음의 먼지이며 구름. 안개와 같은 것으로, 우리 마음에 비추어져야 할 하느님의 빛, 성령의 빛을 막는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명은 우선 마음을 수렴(收斂)하고 가라 앉혀서 고요하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먼저 우리 마음을 잔잔한 물처럼 맑고 깨끗하며 고요한 상태로 만들어야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만나고 우리 자신을 또한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욕(邪慾)은 분심잡념(分心雜念)의 원인이 되므로 일체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 사욕은 말 그대로 나쁜 욕구인데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욕구를 총칭하는 말이다. 창설자께서는 이 사욕을 자주 누룩에 비유하면서, 우리 마음을 헛된 망상과 허영으로 부풀리게 만들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자유의지를 병들게 만들어 죄짓게 하는 악의 세력이니 이를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뿌리는 너무도 깊어 단번에 우리 힘으로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드시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외적 행위를 성화(聖化)하기 위한 용모·언사·태도가 지니는 자연스러운 덕에 관한 계명들인데, 이것들이 분심잡념과 사욕의 제거 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먼저 내면이 정화되지 않고 만들어 내는 겉꾸밈에 지나지 않는 예모(禮貌)는 일시적으로는 가능해도 지속적으로 지닐 수 있는 덕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사로잡힌 자의 용모는 빛이 난다."고 언급하면서 내면생활의 침묵이 수도자의 외모를 결정한다고 방신부님께서는 가르친다.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양심불을 밝히라"고 함으로써 보다 역동적인 내면의성장을 암시하고 있다. 영적 여정에 있어 특히 하느님을 뵙고 모시는 데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자꾸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익은 지식이 되도록 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하느님과 우리의 지성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기능 중에서 이성을 밝혀 이성을 침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양심이라 할 수있다.


때문에 이성의 침묵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양심을 잘 지킴으로써 우리 안에 하느님의 빛이 더 밝게 비추어 지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성의 요구들을 더 잘 극복해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양심의 빛이 밝아지면 하느님의 지성에 가까와져 인간적인 의지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알게 되고 이제 의지의 동작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聖意)를 따른다"는 것은, 영혼은 진리의 근본이신 천주를 알게 하는 의지를 가지며, 의지의 동작은 자유인데 자유는 무엇보다도 선택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자유는 하느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것대신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기에 문제가 되므로 아예 불완전한 우리의 자유는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선택할 수 있는 참된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점성정신(點性情神)으로 일상의 매순간을 성화(聖化)한다.

면형무아(麵形無我)라는 영성의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무화(自己無化)이다. 이를 보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무아 방신부님은 점성정신(點性情神)이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시는데 이 점성정신(點性情神)은 말 그대로 점(點)의 성질에서 나온 정신이라는 뜻이다.

면형(麵形)을 설명할 경우, 형상(形相) 뿐이지 실은 무(無)라고 할 때 무(無)는 말 그대로 없음이니 형상만이 있다는 말과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대신 점은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면서도 모든 선, 면, 부피, 모양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시작이요, 마침을 나타내는 중요한 속성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내세우지 않고 다른 모양이나 형상 속에 숨는 특성이 있어 면형무아의 무(無)나 비허(卑虛), 겸손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적합하다고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점성정신(點性情神)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무(無)를 닮은 존재로서 점(點)이 갖는 비움과 겸손의 길을 걷게 할 뿐 아니라 점처럼 작은 것에 소홀함이 없고, 점처럼 지나치기 쉬운 찰나에도 깨어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면형무아의 여정을 시작하는 근본이요, 기초이며 그 전 과정에서 꼭 필요한 정신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