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숲이야기
삶다운 삶의 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은 그의 나이 37세 때인 1854년 8월 9일 출판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읍 근처의 월든 숲의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명상하며 정신적 낚시질을 했던 2년 2개월간의 삶을 1년간의 삶으로 묶어서 기록한 것이 바로『월든』이다. 이것은 은둔의 신화이고, 에덴으로의 회귀 신화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신화로서 변화의 회오리를 맞고 있는 21세기에 더욱 매력적인 신화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은둔보다는 행동, 에덴보다는 그 이후의 세계, 무위보다는 역동과 변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소로이며, 그가 월든 숲으로 간 것은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였음을 발견할 것이다.
소로가 월든 숲으로 간 것은 호숫가에 사는 것이 자연을 관찰하고 공부하는데 편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도 하지만, 더욱 실제적인 이유는 1839년 2주간 콩코드와 메리맥 강에서 자신의 형 존과 함께 보트를 타고 벌였던 답사에 대한 책을 쓸 조용하고 평온한 공간과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소로는 1845년 7월 4일 월든에 들어가『콩코드와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을 쓰기 시작했고 1847년 월든 숲을 떠나기 직전에 쓰기를 마쳤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고 있는 뭇사람들에게 더욱 지혜롭고 건전한 삶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이려는 것이었다. 『월든』의 첫 장(章) 「경제」의 앞부분에서 소로는 “내가 만나는 젊은이와 마을 사람들의 불행은 농장, 집, 창고, 가축, 그리고 농기구들을 상속받은 데서 온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얻기는 쉬워도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누가 그들을 흙의 노예로 만들었는가?”라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는 생산의 증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욕구에 휩쓸려, 비유적으로 말하면 거의 모두가 흙의 노예로 전락했다. 이런 노예의 사슬을 끊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지 실험한 것이 소로의 월든 실험이었다.
『월든』에서 소로는 “절망의 송가(頌歌)”가 아닌 희망의 찬가를 써서 “이웃들의 잠을 깨우려는 간절한 소망으로, 횃대 위에 올라선 아침의 수탉처럼, 기운차게 뽐내 보고자 한다.” 하지만 소로가 보기에 이웃들의 잠은 깊기만 하다. 물질과 정신의 합일은 인간이 지닌 신성(神性)의 근본이다. 그러나 물질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인간의 신성이 크게 훼손되고, 인간의 정신은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신성(神性)이 있다는데 이게 어인일인가! 밤낮 시장으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노상(路上)의 마부를 보라! 그의 내부에 조금이라도 신성이 움직이고 있는가? 말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이 그의 최고의 의무 아닌가! 해운업자와 비교하건대 그의 운명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사람들에게 소로는 소박, 고독, 그리고 명상의 삶을 외친다.
소로의 직접적인 이웃들은 농장과 가축 등의 모든 상속을 뒤에서 밀고 가는 그의 이웃들이다. 소로는 이렇게 한탄한다. “얼마나 많은 불멸의 영혼들이 이런 엄청난 짐의 무게에 짓눌린 채 연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가!” 그러나 문명의 첨단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의 오늘에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농장과 가축 등의 주력 품목이 기업과 공산품, 고급 아파트, 고급 자동차 등으로 바뀌었지만 이것들을 물려받거나 물려주려고 연신 숨을 헐떡거리는 불쌍한 영혼들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여전히 잘못된 생각에서 헛수고를 한다. 그들은 곧 인간의 우월한 부분까지 갈아엎어서 흙의 퇴비로 써버린다. 어느 옛 책에서 말하듯, 그들은 허울 좋은 운명―흔히 필요라고 부른다―을 구실로,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침입해서 훔쳐갈 재화를 모으는 일에 종사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삶이니, 설사 전에는 모른다 해도 삶의 종말에 다다르면, 그들이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소로가 안타까워하는 이웃들임에 다름이 아니다. 그의『월든』이 여전히 읽히고 있고 또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숲으로 간 것은 인생을 빈틈없이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 정면으로 부딪쳐보고,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있을지 시험해보려고 했으며,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 내가 삶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다. 삶은 아주 값진 것이기 때문에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삶다운 삶의 요체는 무엇인가? 소로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한다. “아무도 이른바 자발적 빈곤의 유리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결코 인간의 생활에 대한 공정하고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 상업, 문학, 예술을 막론하고, 사치스런 삶은 사치스런 열매를 맺는다. 요사이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한때는 철학자로 사는 것이 칭송할 일이었으나, 이제는 철학 교수가 되는 것이 칭송할 일이 된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오묘한 사상을 가졌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지혜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 명령에 따라 소박, 독립, 아량, 그리고 신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삶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용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소로는 특히 월든 숲에서 보냈던 2년 동안 이런 유형의 삶을 실용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문명의 복판에서 삶의 본질을 관찰하고 현명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월든 숲에서의 소로처럼 자발적 빈곤의 위치에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정면으로 부딪쳐봐야 한다. 이를 위해 소로는 원시적인 삶을 살아볼 필요성을 강조한다. “단지 삶의 전반적인 필수품이 무엇이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어떤 방법들이 사용되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물질문명의 한복판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사람들이 가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샀던 것이 무엇이며, 상인들은 무엇을 비축했는지, 다시 말해 무엇이 전반적인 먹을거리와 잡화였는지 알아보려면, 우리는 상인들의 옛 장부를 들여다보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골격이 우리 조상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시대의 발전은 인간 생활의 기본 법칙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로가 강조하는 것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온 산업과 문명의 발전은 대부분 외적인 발전, 다시 말해서 의식주와 관련된 육체적 필수품의 발전에 집중된 나머지 정신적 필수품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거나, 아예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골격이 우리의 조상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정신 또한 그러할진대 세상이 더욱 복잡해져가는 지금 우리의 조상들이 정신의 필수품에 쏟았던 것 이상의 관심, 아니면 적어도 같은 정도의 관심은 기울여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소로는 『월든』에서 육체에 필요한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정신의 양식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삶다운 삶의 길이라고 그의 이웃들에게 말한다. 소로는 이렇게 외친다. “간소화 하라, 간소화 하라. 하루 세 끼 대신에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고,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이고, 다른 것도 이에 비례해서 줄여라.”
항상 깨어 있어라!
월든 숲에서 보낸 2년여 동안에 소로는 “1년에 약 6주 동안 일하면 필요한 생활비를 모두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육체에 필요한 것을 충분히 줄이고 효율적으로 일하면, 1주에 하루의 노동으로도 충분하고 나머지 6일을 더욱 중요한 정신을 살찌우는 일에 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스러운 생활필수품과 비속한 생활필수품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예컨대 “문명이 우리의 집을 개량해 왔지만, 이와 동등하게 집에 기거할 사람을 개량한 것은 아니다. 문명은 궁궐을 창조했으나 귀족과 왕을 창조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문명인의 추구가 미개인의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이 아니라면, 만약 그의 삶의 대부분이 단순히 비속한 필수품들과 안락을 얻기 위해 쓰인다면, 그가 미개인보다 더 좋은 집을 소유할 이유가 있는가?”진정한 경제는 재산을 늘리는 방법과 수단, 사치품 수준의 비속한 필수품을 증가시키는 방법과는 무관한 것이다. 진정한 경제는 육신에게는 육신이 필요한 것만 공급하고, 정신이 본연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합당한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흙에 묻혀버릴 육신인데도 흔히 숙명이라고 불리는 허울 좋은 핑계로 육신을 위한 비속한 필수품인 재화의 획득과 비축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한다. 많은 사람이 사회의 통상적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는 것이다.
소로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일터에 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밥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는 일상을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한 삶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일해서 얻는 “어느 사물의 비용이란, 당장 또는 궁극적으로, 그것과 교환하기 위해 필요한 어느 인생의 양이다.” 사람들은 인생과 재화를 교환하는 것이다.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 근처의 평균 가옥은 8백 달러쯤인데, 이 액수를 저축하려면, 가족 부양의 짐이 없더라도, 노동자 인생의 10~15년 정도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더 받고, 다른 사람은 덜 받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노동의 가치를 화폐로 하루에 1달러씩 계산하는 경우 이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오두막을 마련하려면 보통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비해야 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어렵게 집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해지고, 거꾸로 집이 그를 소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 소로의 주장이다. 우리는 집이나 옷 같은 겉껍질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로부터 성장해야하는 것이고, 그런 내부적 성장을 통해서만 우리의 신성(神性)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성장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무익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다.
소로는 자신이 일상의 길을 가서는 안 되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길은 그가 생각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뭇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좇는 유행을 퍼뜨리는 것은 바로 사치와 방탕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런 유행 특히 물질 중심의 유행을 좇다보면, 그것은 유행을 만드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앞서가는 사람을 좇아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될 것이다. 솔로에게는 삶이 아주 값진 것이기 때문에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묵묵히 일상적 삶에 매달리고 있지만, 솔로는 혹독한 자기반성과 일상적 삶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선택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았다. 소로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을과 마을 사람을 잠시 떠나 월든 숲으로 갔으며, 월든 숲에서 소박하고 고독한 삶을 실험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의 참으로 통하는 사회의 통상적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어 일상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인간의 주목적이 무엇이며, 삶의 진정한 필수품과 수단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인간들이 숙고 끝에 지금의 통상적인 생활방식을 선택했던 것은 그들이 다른 어느 방식보다 그것을 선호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진정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어있고 건전한 사람들은 오늘도 태양이 밝게 떠오른 사실을 기억한다. 아무리 늦어도 우리는 편견을 포기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우리는 증명되지 않은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을 결코 신봉할 수 없다. 오늘 모든 사람이 참이라고 되풀이 외치거나 묵시적인 참으로 통하는 것이 내일이면 거짓이나 연기처럼 사라질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소로는 이렇게 외친다.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탄력적이고 힘찬 생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영원한 아침이다. 시계가 말하는 것이나, 사람들의 태도나 노동이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침은 내가 잠에서 깨어 있고, 나에게 새벽이 있는 때이다. 도덕적 개혁은 잠을 물리치려는 노력이다. 사람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지 않다면, 왜 그들은 자신들의 하루에 대해 그렇게 형편없는 보고를 하는가? 사람은 그렇게 계산에 어두운 존재가 아니다. 졸음에 압도되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인가를 수행했을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육체노동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잠에서 깨어 있으나, 백만 명 중 한 사람만이 지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할 만큼 잠에서 깨어 있고, 1억 명 중 한 사람만이 시적이나 신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잠에서 깨어 있다.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 있는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있다면, 내가 어찌 그의 얼굴을 응시할 수 있었겠는가?”
때맞게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 초조한가요? 마음의 북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탄 기계처럼 일상이 아닌 나 자신이 만족을 느끼는 삶을 누려야 한다.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대신 자주적인 삶을 좇았다.
월든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측량이나 목수일 등 몸쓰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불후의 명성과 불멸의 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