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묵상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

돌체김 2015. 12. 25. 09:58


예수 탄생과 어린시절

Ⅰ. 머리말

영국의 역사학자 웰스는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고 예수님을 기점으로 역사의 전과 후로 나누어지며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확실히 인류 역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분의 탄생이

달력을 바꾸어 놓았고, 이 세상에 벌어진 모든 역사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술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원전과 기원후, 곧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가 바로 그리스도 탄생을 기점으로 한 연도 기술방식이다.

이렇게 인류 역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전과 후로 구분되듯 개인의 역사도 그렇다. 사람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받아들이는 때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구분된다. 이전의 삶이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신만을 위해 산 삶이었다면, 이후의 삶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르는 삶이다.

함마르셸드(노벨 평화상 수상, 유엔 사무총장 역임)는 “믿음을 갖게 된 그날, 내 삶에 의미가 생겼고 세상만사가 이해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 한사람의 진정한 삶은 주님을 만나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예수님이 인류 역사와 개인 역사의 중심이 되는 분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분을 만날 수 있을까? 그분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으며, 무엇을 가르쳤을까?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혼자 하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다.

인간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고, 아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으며, 아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분을 우리 인생의 중심으로

삼고, 더욱 열렬히 그분을 사랑하고, 더욱 충실히 섬길 수 있다.

Ⅱ. 족 보

우리가 아담의 족보에 들어 있을 때에는 죄라는 병균에 감염되어 죽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혈통이 바뀐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죄라는 죽음의 병균에 대해 항체를 갖게 된다.

신약성경의 마태오복음서의 예수님 족보는 예수님이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메시아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족보에는 우리 이름이 들어 있다.

1.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족보는 이렇게 시작된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아브라함보다 후대에 태어난 다윗을 먼저 나오는 까닭은 예수님이 다윗 왕통을 이어받은 왕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대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2. 14대씩 세 그룹으로 배열된 족보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의 조상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을 14대로 압축

하여 기록한다. 이렇게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배치한 까닭은 족보 마지막 문장에 나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마태1,17)

각 그룹의 구분은 이스라엘 구원역사에 있었던 중요한 전환점과 연결된다.

첫 구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인 다윗의 출현까지고,

둘째 구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까지이다.

셋째 구분은 바빌론 유배생활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까지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대로라면 이 족보에 나온 이름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름이 등장해야 함에도 임금들을 14대로 만든 까닭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왕통을 잇는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4라는 숫자는 다윗 임금의 히브리 이름의 숫자 값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서는 예수님이 다윗 왕통을 잇는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 각 그룹을 14대로 만든 것이다.

둘째, 유다인들에게 14라는 숫자는 거룩하고 완전한 숫자인 7의 배수이기 때문이다. 7을 중복함으로써 거룩함과 완전함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3. 우리 이름으로 끝나는 예수님 족보

앞서 말했듯이 만일 예수님의 족보에 우리 이름이 들어 있다면 그 족보를 읽으면서 지루하거나 성가시기는 커녕 오히려 가슴이 뿌듯하지 않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족보에는 우리 이름도 들어 있다. 지금부터 그것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첫 구분 - ①아브라함 ②이사악 ③야곱 ④유다 ⑤페레즈 ⑥헤츠론 ⑦람 ⑧암미나답 ⑨나흐손 ⑩살몬 ⑪보아즈 ⑫오벳 ⑬이사이 ⑭다윗

둘째 구분-①솔로몬 ②르하브암 ③아비야 ④아삽 ⑤여호사팟 ⑥여호람 ⑦우찌야 ⑧요탐 ⑨아하즈 ⑩히즈키야 ⑪므나쎄 ⑫아몬 ⑬오시야 ⑭여호야킨

셋째 구분-①스알티엘 ②즈루빠벨 ③아비훗 ④엘아킴 ⑤아조로 ⑥차득 ⑦아킴

⑧엘리웃 ⑨엘아자르 ⑩마탄 ⑪야곱 ⑫요셉 ⑬ 예수님 ⑭ 김바오로

족보가 세 그룹으로 되어 있고 각 그룹마다 14대씩 되어 있으니, 모두 합해 42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41대다. 마태오의 실수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직업이 세리였던 만큼 셈이 밝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마태오가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를 42대라고 한 이유는 마지막 42대에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 맨 마지막에 각자의 이름을 기록해 넣어야 한다.

4. 생명의 족보, 예수님 족보

족보에는 누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를 기록한다.

아담의 족보는 이러하다. 아담은 셋을 낳은 다음… 모두 구백삼십 년을 살고

죽었다. 셋은 에노스를 낳은 다음… 모두 구백십이 년을 살고 죽었다.(창세 5,1-8)

아담의 족보에 나오는 인간의 수명은 현재 우리의 수명보다 월등하게 길어서 부러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 역시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는 누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어느 누구를 낳고, 어느 누구는 누구를 낳고’ 식이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마탄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요셉을 낳고, 그 요셉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마태1,1-16)

렇게 예수님의 족보에는 죽었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렇까? 그것은 로마서 5장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담을 통해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는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기에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마지막 42대에 기록될 이름은 세례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 이름이고 예수님의 족보에는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서 어떤 영적 메시지를 얻는가?

지금부터 약 350년 전 영국에 흑사병이 펴져(1665) 런던에서만 무려 10만여 명이 죽어 나갔다. 무섭게 퍼져 나가던 흑사병은 영국 북부 셰필드의 이웃 마을인 아이언이라는 조그만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다. 아이언 마을 사람들은 세상과 고립된 채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다. 그리고 일 년이 흘렸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이언을 찾은 이웃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무려 절반이 넘는 마을 주민들이 흑사병을 이기고 살아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비결은 혈통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의 DNA를 조사한 결과 그들은 흑사병균을 막아주는 항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아이언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 역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죽음을 가져오는, 영혼의 흑사병인 죄의 세력에 대한 항체를 혈통에 갖고 있는 존재란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우리가 아담의 족보에 들어 있을 때에는 죄라는 무서운 병균에 감염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혈통이 바뀐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죄라는 죽음의 병균에 대해 항체를 갖게 되어 죄의 세력이 아무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려 해도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항체가 그것을 이겨내기 때문이다.

가.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네 여인

예수님의 족보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여자들의 이름이 나온다는 점이다. 혈통을 중시하는 유다인 족보에는 통상적인 여자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유다문화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문화로서 남자의 혈통만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외에도 네 명의 여자 이름이 나온다.

곧 타마르(마태1,3), 라합(마태1,5), 룻(마태1,5)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다(마태1,6)

여자가 다섯 명이나 등장하는 점도 놀랍지만 그들의 신원을 보면 더욱 놀랍다.

마리아를 뺀 다른 네 명은 이방인(타마르 아람인, 라합 가나안인, 룻은 모압인, 우리야 히타이트인)인데다 신분상 문제가 있거나 비정상적인 혼인관계에서 아들을 낳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보통 유다인 여자는 이방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이방인과 결혼을 금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조상이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네 명이나 이방인 여자와 결혼했고, 그 중 보아즈는 이스라엘이 혐오하는 모압족 여자 룻과 결혼했다.

나아가 이 여자들은 신분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다. 타마르는 신전 창녀로 변장, 라합은 창녀, 밧 세바는 유부녀였다.

예수님의 족보에 구태여 여자들의 이름을 넣어야 했다면 훌륭한 여자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 야곱의 아내 라헬이나 레아 등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마태오는 문제가 많은 이방인 여자, 창녀였던 여자, 며느리였던 여자, 남의 아내였던 여자의 이름을 족보에 넣었다. 왜, 무슨 목적으로 그랬을까? 그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은 바오로가 말해 준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 예수님 안에서, 그동안 사람들 사이의 일치와 화합을 기록고 있던 모든 선입견과 장벽이 무너진다. 곧 유다인과 이방인의 장벽, 남자와 여자의 장벽, 신분의 장벽이 무너진다. 이런 의도로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족보에 죄스런 여자들의 이름을 넣어 이 점을 강조한다.

나. 그렇다면 남자들은?

족보에 나오는 남자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훌륭한 인품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인가?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조상 중 많은 이가 죄인이었다.

유다는 레위법을 어기고 며느리를 방치했던 죄인이고, 다윗은 남의 아내를 가로챈 사람이고, 솔로몬은 이방인 여자들은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들의 이방잡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온 죄인다. 므나쎄 아몬도 솔로몬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죄인들이다.(2열왕 21,6.22)

유배 이전의 임금 가운데 히즈키야와 요시야 두 임금만 하느님께 충실했고, 다른 임금들을 하나같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방탕한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족보가 수많은 죄인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조상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세상 사람들은 집안의 비밀이나 자랑스럽지 못한 조상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에는 집안 망신시킨 사람들의 이름이 버젓이 올라 있다. 그 까닭은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의 자질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과 맺으신 충실한 약속에 따른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족보는 인간의 죄스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성실하심을 드러낸다.

죄악과 범죄로 범람하게 된 역사의 강물은 차츰 때가 무르익어 감에 따라 맑은 샘물로 변한다. - 응우옌반투안

Ⅲ. 탄 생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분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32)

1. 탄생 예고

교회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의 잉태 소식을 전해 준 사건을 가리켜 ‘성모영보’ 또는 ‘주님 탄생 예고’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천사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루가 1,26-38)

2. 마리아의 용기 있는 대답

성경을 보면 하느님이 누군가를 당신 일꾼으로 부르실 때 대부분 처음에는 거절한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자기 입술이 더럽다고, 예레미야는 어린 나이라고, 기드온 역시 어린 사람이라고, 모세는 다섯 차례나 거절했다. 신약에 와서는 베드로가 자신은 죄인이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달랐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즉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며 승낙한다. 마리아가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한 것은 주님이 주신 사명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겸손하게 의무를 받아들일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3. 마리아의 ‘예’가 주는 가르침

마리아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한 말은 탁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응답이다.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순전한 암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이 전부이기에 그분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뤄지기만을 원한고다고 했듯이 마리아는 참으로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본디 신앙을 가리키는 라틴어는 ‘피데스fides'다. 그런데 교회는 마리아의 신앙을 피데스라고 부르기보다 피에타pieta'신앙으로 명한다. 피에타 신앙이란 ’충실한 신앙‘, ’큰 신앙‘, ’고통까지 받아들이는 신앙‘이란 뜻이다. 그렇다. 마리아의 신앙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큰 신앙이다. 마리아는 일생 동안 피에타 신앙으로 살아가신 분이다. 마리아는 아들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아들을 당신 가슴에 안기까지 큰 신앙으로 사셨다.

4. 임신 소식을 들은 요셉의 반응

요셉은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요셉은 의로움은 율법주의적 정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을 바탕으로 한 의로움이다. 십 대 후반의 젊은이 요셉이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 앞에서 취한 태도는 너무나 놀랍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인에 대한 자비와 연민이 깊은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18-20)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성 요셉께 간구하는 이들은 누구나 평범한 일상에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때로 피곤하고 짜증이 나고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성 요셉님, 저를 위해 빌으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다. 긴장하거나 어려운 일들로 삶의 평화를 빼앗길 때나 흥분이나 조급증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나 외로움과 욕망에 시달릴 때도 ‘성 요셉님, 저를 위하여 빌으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다. 이렇게 성 요셉께 화살기도를 바칠 때, 이 짧은 화살기도가 우리 삶의 균형을 잡아주고 영혼에 활력소가 되어 일상을 기쁘게 살아가는 힘을 가져다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예수님은 이렇듯 훌륭한 신앙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나셨다. 그 분들의 무조건적인 순명이 있었고 이렇듯 하느님의 구원사업에는 굳은 신앙으로 응답하는 협조자들이 필요하다.

5. 아기의 이름

유다 사회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이 이름을 정하시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알려준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하여라

(루카 1,3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리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1,21-23)

이 성경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아기의 이름은 ‘예수’와 ‘임마누엘’ 두 가지다.

♣ 예수

예수는 본디 히브리어 ‘예수아“다. 예수의 뜻은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란 의미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느님 안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로니모 성인이 예수님께 선물을 하셨는데 아기 예수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정말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그대의 모든 죄와 욕망을 나에게 다오. 내게 필요한 선물은 바로 그것이니. 나는 그대의 죄와 욕망을 위해 십자가에서 다시 죽을 것이다. 이것만큼 내 마음을 기쁘게 할 선물은 없다.

클레르보의 베르나으도 성인도 “예수란 이름은 죄인들에게 절망의 끝이고 희망의 시작이다. 죄인들은 예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갈 희망을 갖는다.”라고 말했다.

♣ 임마누엘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곧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주님의 현존과 한결같은 돌보심을 믿는 영성, 곧 임마누엘의 영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양식을 결정짓는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삶에서 주님과 일치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은 주일날 교회에 나가고 아침저녁 기도하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은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1코린 10,31),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삶의 매 순간 임마누엘의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삶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 하지만 삶이 고통스러울 때는 다르다. 그분께 울부짖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을 치워 달라고 울부짖기는 하지만, 그분이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나든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임마누엘 영성은 히브리서에 잘 나와 있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히브 13,5) 이 말씀에는 부정어가 무려 다섯 개나 들어 있다.

이렇게까지 주님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시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이렇게까지 약속하고 있으니 꼭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살이가 아무리 힘겹다 하더라도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다는 점을 꼭 믿으라는 것이다.

6. 일상에서 천국을 사는 큰 믿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갓난아기 수준으로 주님의 즉각적인 돌보심만을 계속 청하고 당신께 당장의 허기를 해결해 주고 달래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시기를 요구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요구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도 않고 돌보아 주시지도 않는다고 원망을 할 것이다. 반면에 대상 영속성(어떤 대상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대상이 저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능력)을 지닌 영적인 어른으로 언제나 어떤 상활에서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돌보아 주심을 인지할 것이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영성을 살 때 매일의 삶에서 천국을 누리게 된다. 매 순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7. 예수 다음에 임마누엘을 언급한 이유

마태오복음서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소개하고 나서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소개한 이유는 예수는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고, 임마누엘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또특별한 이유는 우리의 죄 문제가 예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비로소 임마누엘의 삶, 곧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임마누엘의 삶은 불가능하다.

죄의 속성은 하느님과의 단절이다. 이 점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과일을 따 먹은 후 즉시 하느님을 피해 숨는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한테서 멀어지게 만든다.

※ 하느님이 우리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죄를 짓게 되면 미사 참례도, 기도하는 것도 싫어지는 것이다. 죄를 짓고 나서 임마누엘의 주님과 함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달려가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이름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받고 나면, 우리는 다시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하게 된다. 인간인 우리는 죄로 인한 단절의 슬픔과 일치의 기쁨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할 것이다.

8. 예수가 탄생한 곳

가.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은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령에 따라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그 본적지에 가서 호적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베들레헴은 메시아(그리스도)가 탄생할 장소로 예언되었다.

나. 그들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다. 만왕의 임금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신 까닭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가축들의 오물냄새가 진동하고 찬바람이 불어오는 마구간에서 당신의 아들을 태어나게 하셨을까? 금빛 찬란한 왕궁의 상아 요람에 당신 아들을 눕히기 않으시고, 왜 짐승의 여물통에 눕히셨을까? 그 이유는 절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서, 고통 받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9. 아기 예수를 처음 경배한 이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경배한 영광을 얻은 이들은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었다. 하필 왜 이들에게 이런 영광이 주어졌을까? 목자들은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먼저 돌보아 주셔야 할 죄 많고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들을 대표하고,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구원 선물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주어질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밝히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왔다.”(루가 5,31-32)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동일시하셨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36)

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루카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준 다음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해서 자동으로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 그 분을 모시고 살아갈 때 비로소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굴곡을 겪어야 하지만, 그분 뜻에 순종하며 산다면 우리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인생의 모든 자리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기쁨과 평화의 자리에서뿐 아니라 근심, 좌절, 실패, 걱정, 나아가 전쟁을 할 때에도 주어진다.

나. 그 밖의 성경 구절들

성경 말씀 중에는 ‘하늘에는 영과, 땅에는 평화’처럼 우리가 좋아하지만 대충 알고 있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이 있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오로 사도에 로마에서 말한 구절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우리가 그분께 나아간다고 해서 무조건 편히 쉬게 되고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 배워야 한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의 성품을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다. 망각이라는 고질병

목자들은 구세주를 만나 후 기쁨에 가득 차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우리는 망각이라는 고질병이 있다. 우리는 피정이나 미사중에 하느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을 하고 감격하여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지만 그 마음은 그 리 오래가지 못하다.

우리가 쉽게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린다. 아침에 눈뜨면 하루의 삶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과 동행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까마득히 잊고 산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느새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하루를 보내고 마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 안에 매일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를 그토록 빨리 잊게 만드는 건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두가지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세상일에 쫓기는 삶

사람은 바쁘게 살면 쉽게 잊어버리고 자연스럽게 자기 근본을 잊고, 삶의 우선순위를, 무엇보다도 생명의 원천인 주님을 잊게 된다.

바쁜 일상은 가장 먼저 소홀하게 되는 것이 관계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관계인데 그 관계를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바쁘다 보니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할 틈도 없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에서 오는 위로와 기쁨을 얻지 못한다.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이다.

2) 끊이지 않는 근심 걱정

일반적으로 사람은 하루 6만 가지 정도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대개가 일상에 대한 자질구레한 것들로, 대다수가 근심 걱정들이다. 돈, 아이, 건강, 직장, 업무, 고지서 걱정 등.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 머릿속은 이러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것이 생각과 감정, 나아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여 마침내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끝내는 건강까지 망가뜨리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면서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에너지를 탕진하다면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영성신학자들은 근심 걱정을 불신앙과 동일시한다. 아무리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니, 결국 하느님의 주권과 돌보심을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성모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에 바쁘게 사셨고 근심 걱정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처럼 하느님과 그분의 돌봄을 잊고 사시지 않았다.

마리아는 당신이 듣고 보았던 모든 신적메시지와 체험들을 평생기억하며 마음속에 간직하셨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마리아의 태도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마리아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마리아로 부르신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출산하라고 부르신다. 우리 안에, 세상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낳으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라. 목숨과 시간을 내어놓을 만큼 중요한 동방박사들의 주님 경배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미사에서 물론이요, 우리 삶의 자리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기까지 험하고 힘든 여행을 했다. 목숨까지 위협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도 많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면 거의 1500킬로미터를 여행한 셈이다. 이들이 그 험하고 먼 길을 걸어온 까닭은 오직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목숨과 시간을 내어놓을 만큼 중요하다.

마. 분연히 떠나야 하는 우리의 내적 여정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와 함께 탐험정신을 주셨다고 했다. 사실 인류 역사는 탐험정신과 함께 발전했고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인류 역사도 그렇지만 개인 역사도 영적 탐험을 통해 발전한다. 동방박하들처럼 우리도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진리와 본질에 대한 갈망으로 분연히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신양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자주 ‘그 길을 따라가는 이’라고 하는데 이를 한자로 말하면 구도자(求道者)다. 우리 구도자들이 걷는 ‘길’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다. 우리 모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14,6)이신 예수님을 따라 순례여정을 걷는 구도자들이다.

구도자의 삶이란 꼭 수도원이나 산사에 들어가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뤄져야 한다. 가는 길이 힘들고, 가다가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할 때, 우리는 내면은 어느새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바. 나태에 대한 경각심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그러라고 배를 만든 것은 아니다.

- 그레이스 머리 호퍼

분연히 떠나야 하는 내적 여정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 요소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안주 욕구, 다시 말하면 나태(懶怠)다. 나태는 칠죄종(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의 하나로서 우리의 구도 삶을 방해한다.

나태는 영적으로 그 사람을 깨어 있지 못하게 만든다. 나태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볼 갈망을 없애버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의문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삶의 목적이나 삶의 의미를 별세계 사람들의 화두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변화를 향한 주님의 초대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통합된 삶을 위한 내적 여행에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편하고 익숙한 안전지대에 머물고 싶은 유혹을 과감히 떨쳐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 신실한 벗의 필요성

영적 우정의 가장 큰 유익은

함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폴 워델)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영적 탐험의 길에서 내․외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을

때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세 사람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순례의 벗이 되어 서로를 격려하면서 곤경을 이길 수 있었다.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다. 포도나무를 보라. 포도 한 알만 익는 경우는 없다. 포도알들은 함께 익어간다. 기러기가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것은, 그렇게 해야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구도의 길은 결코 쉽거나 편한 길이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함께 걷는 신실한 벗이 꼭 필요하다. 무인도에서 뗏목을 띄울 때 가장 먼저 실어야 하는 것은 식량이 아니라 동료란 말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동료의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뜻을 같이 하는 든든한 동지가 있을 때 우리는 혼란과 회의에서 더욱 빨리 벗어나 다시 열정을 회복하여 구도의 길에 용맹 정진할 수 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집회 6,16)

10. 이집트의 피난과 헤로데의 어린아이 살육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려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헤로데는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마태 2.1-5.7-9.16)

헤로데는 아기 예수를 죽일 계획이 갖고 있는 것을 아시고 하느님이 개입하신다.

하느님이 꿈에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나시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한다. 이 지시를 받은 동방박사들은 다른 길로 해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헤로데는 격노해서 베들에헴 지역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하느님은 이러한 헤로데의 만행을 막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일예로 하느님은 왜 히틀러가 육백만 명의 유다인들을 죽이는데도 가만히 계셨을까? 나치에 저항하다 사형당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말한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도 하신다. 털끝만한 잘못도 없이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를 잠자코 보고만 계시지 않았던가?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서 그리도인들의 몸이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길 때도 침묵만 지키시지 않았던가?

하느님 백성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다. 어둠의 세력과 그에 동조한 악인들은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끝없는 폭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그리스도교 저술가인 켈러는 ‘하느님 왜 악과 고통을 막지 않으실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답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알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우리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초연해서도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 불행과 고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그분 십자가를 지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인생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도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가. 성가족의 이집트 피난

헤로데가 베들레험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기 직전,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서둘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할 것을 지시한다. 요셉은 그 지시에 즉시 순응한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니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3-15)

위 본문에 나오는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는 문장에 주목하자.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아기와 네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가 아니라 아기 예수의 어머니로 불린다. 이는 요셉이 살아생전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그의 사명은 구세주인신 아기 예수가 마리아 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1. 나자렛으로 돌아옴

예수님은 나자렛엣 성장했기 때문에 보통 ‘나자렛 사람 예수’ 또는 ‘나자렛 예수’로 불린다. 성가족은 이집트에서 피신생활을 마친 다음 이스라엘로 돌아가 갈릴래아의 작은 고을 나자렛에서 살았다.

12. 하느님의 연애편지, 꿈

성경은 자주 하느님이 꿈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고 언급한다(약 150번) 아기 예수 탄생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요셉에게 네 차례나 꿈을 통해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시고, 동방박사들에게도 꿈을 통해 헤로데 대왕에게 가지 말라고 지시하신다. 하느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점은 교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유스티노, 이레네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노, 아우구스티노,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 많은 교부가 꿈에 해난 체험을 기록했다. 하지만 5세기 이후 꿈 해석이 예로니모 성인(347-420년) 불가탄 성경의 의해 금기시되기도 하였지만 그분이야 말로 꿈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꿈을 통한 영적 성장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하느님은 꿈을 통해 당신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많지만 우리는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그 말씀을 듣지 못한다. 설사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자기방식대로 하느라 듣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꿈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다. 닫혀 있는 우리 마음에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자 꿈으로 찾아오신다. 꿈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통찰이나 경고를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탈무드에 의하면 “하느님이 매일 밤 우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데 우리는 봉투도 뜯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또 융 분석가 존스는 “무의식의 기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에게 말을 건네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의 과제들에 치여 있어 그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밤을 틈타 찾아오는 것이다.”

다윗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솔로몬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젊은 나이에 임금이 되었으니 경험도 지혜도 부족하고, 아버지가 워낙 위대한 임금이었기에 그 되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솔로몬은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던 날 주님을 만난다. 주님이 솔로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그는 슬기로운 머리를 달라고 청한다(1열왕 3,5이하) 하느님은 그에게 슬기로운 머리는 물론 부와 명예도 약속하신다. 이 일화는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1열왕 3,15)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하느님은 꿈에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것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박승현 양은 91년 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17일 동안 콘크리트 더미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7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지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이 전해 준 먹음직한 사과 하나를 받는 꿈을 소중히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죽음의 골짜기에 있을 때, 꿈을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인생에서 결정적인 시기나 중요한 시기에 신비스런 꿈을 꾼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그러한 꿈을 원초적 꿈, 또는 원형적 꿈이라고 한다. 원초적 꿈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과 관련해 꾸는 꿈이다. 곧 자기완성이나 생명 보존과 관련된 생의 중요한 순간에 꾸는 꿈을 말한다.

박승현 양은 극한상황에 처해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죽을 때만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원초적 꿈을 꾸었다. 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극한상황에서 무의식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생명의 힘이 꿈으로 표출되어 그녀를 지켜준 것이다.

성경은 성령과 인간의 영을 모두 ‘프네우마’로 표기한다. 이는 우리 영이 하느님의 거룩한 영과 통교한다는 말이요, 우리 영에 신적 통로가 마련되어 있는 말이다. 우리가 위기의 순간이나 인생의 전환점에서 절망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돌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이 성령의 생명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영과 통교하시면서 신적 생명을 부어주시고, 우리 무의식은 원초적 꿈을 통해 그 생명력을 전달해 준다.

13. 꿈을 통해 생명력을 전달 받는 구체적인 방법

아침에 일어나 간밤에 꾼 꿈을 기억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더 생기 있게 새로운 날을 살아간다. 그것은 그들의 정신과 영이 통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몸, 정신, 그리고 영으로 이어 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완전함과 거룩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몸과 정신과 영의 조화가 깨지게 되면 안정감과 일체감을 잃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꿈을 읽고 삶을 성찰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은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기억나는 꿈을 적어본다. 꿈은 옆으로 돌아눕는 순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옆에다 메모지를 준비해 두고 깨어나면 즉시 기록한다.

꿈 해석과 관련해서 꿈 자체는 좋은 꿈, 나쁜 꿈이 없다는 것이다. 꿈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꿈에 대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풍요로운 삶, 창조적 삶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Ⅳ. 공생활 이전의 삶

아기 예수가 어떻게 자라나 소년이 되었는지 성경만으로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아기 예수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랐고, 정신적으로 지혜가 자랐으며, 영적으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 성장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가 2,40)

1. 유아기에서 소년기로

성경은 아기 예수가 육체적·정신적·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의 영적 성장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이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저녁 늦게까지 놀거나 TV를 보다 그냥 잠자리에 들기 하기보다는 잠시라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곧 잠자리에 들면서 예수님께 하루를 돌보아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게 한다든지, 잠들기 전까지 재미있는 이야기 성경을 읽어준다.

그리고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자기만의 성경을 마련해 주어 매일 10분이라도 성경을 읽도록 권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예수님과 친구되어 하루를 살겠다는 기도를 드리게 하고, 식사 때 식구가 돌아가면서 식사기도를 한다.

가. 유아세례

한 사람의 신앙생활은 어릴 때의 환경은 중요하다. 부모가 경건하고 생생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자녀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부모가 성경을 읽으면 자녀도 성경을 읽을 것이요, 부모가 기도하면 자녀도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성당에는 나가도 실제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자녀들은 그러한 부모에게 실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신앙에 대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도 가치를 두지 않게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성경을 펼 때는 구역모임 때뿐이라는 것과 부모가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적인 욕심을 더 챙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가 어떻게 말을 하든 상관없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 잘 안다.

부모는 자녀들의 육신의 건강은 챙기면서 영혼의 구원과 영적 성장을 위한 신앙생활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육신의 건강도 소홀이 할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이 아닌가! 하느님의 은총은 어떤 조건에서든 어린 자녀와 함께 해야 하는데, 만일 부모가 자녀를 영적 차원에서 계속 눈먼 자로 있게 한다면 그 책임은 막중하다.

부모는 내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돌봄을 받으며 살고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그러한 주님을 어서 알려주고 사랑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가정의 권위는 하느님께

아이들이 영적 성장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가정의 권위가 하느님께 있어야 한다. 잭과 주디 볼스윅은 「크리스천 가정」에서 가정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유형은 권위가 가장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전통적 가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전통적 가정과 정반대다. 가정 안에 권위가 전혀 없이 가족 구성원이 모두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규율이나 질서가 없고 혼란과 갈등이 자주 발생한다. 심지어 어떤 가정은 모든 일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간다. 오늘날 자녀를 한두 명만 둔 가정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께 권위가 있는 가정이다. 하느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시기에 가족 구성원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손종하여 살아간다. 이런 가정에는 질서와 건강한 자유가 공존한다. 가정기도를 드리는 집안은 가정의 권위가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집안이다.

2.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일어난 일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년기와 공생활 사이에 있었던 유일한 사건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사건이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돌아갈 때 예수님이 그대로 남아있는데도 사흘 되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은 일이다.

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소년 예수의 첫 자각

열두 살 된 예수님이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한 말은 복음서들 안에서 예수님이 가장 처음 한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이다. 시작과 끝이 모두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예수님이 걸어야 할 운명의 길에 대한 자각이 열두 살 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느님임을 자각하고 아버지가 계신 성전에 머물면서 그분의 뜻과 진리를 더 잘 알기 위해 율법학자들에게 질문도 하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들으려 했다는 것이다.

나. 아들 예수와 성모님의 분리

성모님이 3일 만에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찾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다(루카 2,48)”고 말하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대답한다. 성모님은 “네 아버지” 곧 요셉을 가리켰는데, 소년 예수는 “제 아버지” 곧 하느님을 가리켜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하느님이 누군가를 부르신다면 그는 하느님을 둘째 자리에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하느님이 전부다.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성모님조차도 이런 사실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열두 살 예수는 삶의 의미와 가치관에 대한 답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하느님이 계신 성전에 영원토록 머물고 싶다는 자기 존재의 의미와 기쁨을 온통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성장 환경

예수님은 양부 요셉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그는 가난한 목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성모 마리아가 정결예식 때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루카 2,24) 본디 정결예식 때 봉헌하는 제물은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다(레위 12,8)

가난했던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면서도 투덜대거나 대충대충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짝 하나를 고칠 때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공생활 시작 전까지 계속되었다(루카 3,23)

성모님을 향한 예수님의 효심은 당연히 지극 정성이었다. 이 효심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당신이 사랑하던 제자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당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다(요한 19,26-27)

예수님은 인류 구원사업이라는 중책을 수행할, 하느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면서 가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를 모시는 데 성실했던 예수님은 훗날 제자들에게 작은 일에 성실한 자만이 큰일에도 성실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태 25,21-23)

예수님은 떠돌이 목수로서 공생활 이전까지 성실하게 사셨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 일을 주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하느님은 이렇게 사소하고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일도 당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요강을 닦든, 설거지를 하든, 밥을 먹든,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일을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가. 자연환경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성장했다. 그곳은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호수 서북쪽 주변으로 건네사렛 평야가 펼쳐져 있어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예수님의 내적 세계는 갈릴래아 호수와 건네사렛 평야 등 하느님의 자연 세계와 더불어 심화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그분의 가르침이 자주 자연을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옷자락으로 보았고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만나셨다.

우리는 자연과 얼마나 가까이 지내는가? 능률과 성취만을 중시하는 세상에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너무 바빠서 또는 세상일에 정신이 팔려서, 무질서한 인간의 육욕과 애착에 사로잡혀서 자연을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세계를 통해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가 자연의 어떤 것이든 가만히 들여다보는 순간, 신비롭고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요, 우리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려 애쓰시는 사랑의 아빠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생존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보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인 자연은 치유의 힘이 있다. 사람의 치유에 가장 좋은 진동수는 자연 에너지의 진동수다. 우리의 작은 에너지가 대지의 무한한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켜 건강한 대지의 에너지를 닮아갈 것이다.

나. 일상 삶과 사람들

예수님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주변 사람들을 깊이 바라보며 세상을 알고 하느님 섬김과 인간 섬김의 방법을 배우신 듯하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가 빵을 만들 때 누룩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고, 암탉이 병아리를 조심스레 날개 밑에 모으는 것을 보았으며,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를 보았다. 이러한 관찰은 훗날 그분의 가르침에 사용된다.

예수님은 특별히 불쌍한 사람들을 눈여겨보셨다. 그분은 지방장관에게 줄기차게 청원해 드디어 목적을 달성해 낸 옆집 여인(루카 18,1) 등 불쌍한 이들을 보고 아파했던 예수님은 훗날 이렇게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0-21)

이렇게 예수님은 섬세한 눈으로 실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다. 구약성경

어린 예수는 다른 유다의 어린아이들과 똑같이 다섯 살부터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실 때 당연히 꼼꼼하고 깊이 있게 읽으셨을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 사례들은 복음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활 신앙에 대한 의심을 품고 엉뚱한 질문을 던진 유다 지도자들(사두가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유다 지도자들에게 “성경도 모르고” 라고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이 성경에 능통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깊이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주 구약성경을 인용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광야에서 사탄이 유혹할 때에 세 차례 모두 신명기에 나오는 성경 말씀을 들어 물리치셨다(마태 4,4,7,10)

그뿐만 아니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율법서(모세오경)에 나오는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이 즉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대답하신다.

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속량하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또한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성화(聖化)시키기 위해서다. 곧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형성시키고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성경과 여러 교부가 이 점을 역설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마태 5,48)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

을 이르게 됩니다(콜로 3,9-10; 에페 4,24)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

이 되십시오(1베드 1,15)

교부 이레네오는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고 한다. 아타나시오는 “우리를 하느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처럼 되셨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의 로고스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강한 수사학적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 안에 이루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을 유산시키는 것이다.”고 말한다.

교부들이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실제로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처럼 변화되어야 하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어진 사명을 열심히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품이 형성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성령의 거룩한 변화작업에 협력하여 주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면 닮을수록,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느님을 알아보게 되고, 그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벌거벗은 채 태어난 것은 네가 자신을 포기해야 함을 알리기 위해서이며

내가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유일한 부로 여기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구유에 태어난 것은

네가 모든 환경이 거룩하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약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사랑으로 태어난 것은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밤에 태어난 것은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비추는 나를 믿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네가 하느님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내가 박해 중에 태어난 것은 네가 어려움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단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복잡한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 생명 안에 태어난 것은

너희 모두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 람베르트 노벤, 〈내가 태어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가장 큰 선물은 구원과 성화!’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의 모든 것들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어떠한 경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과 사랑으로 살아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