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신문보는 여유...

돌체김 2008. 4. 10. 09:02

신문의 논조는 철학이라 하지 않고 시각이라 한다. 신문은 ‘혜안’보다는 정보나 상 식이다. 그런데 또 그 정보는 얼마나 빠르게 낡아버리는가? 우리들은 지난 신문은 읽지 않는다. 하루만 지나면 생기를 잃어버리는 게 신문인데 왜 여전히 신문을 볼까? 전문직일수록, 학력이 높을수록, 소득이 많을수록 신문을 선호하고 활용한다는데 신문의 매력은 무엇일까?

신문 통해 정보 얻는 인구 늘어

사실 신문은 창조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다. 신문은 일상이고 밥이다. 일용할 양식이다. 혜안은 그것이 없어도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당장 당황한다. 물론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일들이 문자가 돼 북적대는 것이 싫어 신문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죽하면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은 신문의 1면을 두고 우리 사회의 집단 그림자라고 했을까? 어둡고, 시끄럽고, 불쾌하고, 무례하고, 부끄러운 사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억압이 큰 사람일수록 격렬하게 반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신문은 내 마음속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왜 생기는가? 그림자는 사회화 과정에서 사회가 외면하고 거부하고 억압한 특질이 인간 내면에 쌓이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억누르고 외면하고 방치한 그림자는 감춰둔 채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에너지를 발휘해서 삶을 훼방하고 파란을 만든다. 내가 그토록 충동적이었다니, 내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다니, 내가 그토록 파괴적이었다니 하면서 ‘나’에게 놀란 적이 없는가? 버림받은 그림자 짓에 대한 ‘나’의 탄식이다.

그림자는 존재의 이면이다.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그림자를 버리려 하면 존재가 분열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그러니 그림자는 외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할 것이고, 억압해야 할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할 것이다.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품는 그것을 우리는 진실이라 부른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만큼, 품는 만큼 에너지가 된다.

그러고 보니까 신문은 에너지가 널려 있는 시장판이다. 상처 입은 자가 어떻게 재단되는지,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어떤 조류가 밀려오는지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이 무엇에 냉혹하고 무엇에 너그러운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문이 팔고 있는 시각 속엔 우리가 선악이라 부르고 상식이라 믿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신문 특유의 페르소나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우리 사회가 공명할 수 있는 진실을 상기시키는 일이 신문에 대한 우리의 중요한 기대다. 한때 신문이 위기를 맞았던 것은 그 진실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이 좀 더 다양하게 진실을 만날 수 있는 인터넷 매체로 이동해 간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정보가 다양하다 보니 자질이 없는 글도 걸러지지 않고 떡하니 정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거름 장치가 없다는 것, 그것은 인터넷의 매력이자 치명적 한계다. 거기서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요즘 다시 활자 매체로 돌아오고 있다.

콘텐츠 정리, 인터넷보다 뛰어나

인터넷 정보는 즉응()적이고 감각적이다. 화면은 종종 생각을 방해한다. 인터넷 바다를 헤매다 신문으로 돌아오면 활자와 함께 ‘생각’이란 걸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글을 따라가면서, 딴죽을 걸어 보면서, 쉼표를 찍어보면서.

살아 보면 사소한 재미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재미 중에 아침에 차를 마시면서 신문 보는 재미가 있다. 차는 여유가 있어야 마시고 신문은 여유가 있어야 보인다. 아침에 신문도 볼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는 인생은 그가 재벌이라도 부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