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은 배타적인가 관용적인가
우선 종교인들이 타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사에서 미국인 89%는
'타 종교인이라도 선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응답했다. 대부분 기독교인인 이들이 타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관용적으로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저자들은 미국인들이 다양한 종교인과의 관계를
통해 타 종교에 대해서 관대해졌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던진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는 '가장 가까운 다섯 사람의 종교'에 대한 것이었는데 평균적으로 2.6명만이 같은 종교를 가졌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절반은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무신론자였다. 이렇게 다양해진 관계망은 결국 내 친구의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타 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관용성이 종교 간 평화적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고 저자들은 봤다. '종교적 차이가 사회적 분열을 가속하고 있다'는 종래의 관점을 뒤집은 것이다.
공존을 넘어 종교를 통한 시민사회의 발전이 가능한가도 살피고 있다. 그간 종교인들이 비종교인들에 비해서 자원봉사나 사회적 기부에 열심인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인은 종교 활동에만 치우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일반 사회적 기부도 더 많이 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사회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종교적인 사람들은 사회 발전을 위한 시민적 참여에서도 비종교인에 비해서 두 배 이상 열심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 요인은 무엇일까.
◇관용의 출발은 관계
다시 사회적 연결망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즉 설교나 의식과 같은 종교적 과정보다는 종교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모임, 그리고 모임 안에서 일어나는 친구와 수다 혹은 대화를 통해 '참여 동기'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종교의 평화적 공존, 종교를 통한 시민사회의 발전 가능성 둘 다 '인간적인 관계망'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퍼트넘이 2001년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제기한 문제의 대답이다. 그 책에서 그는 미국인들의 사회성이 약화되어 가는 것에 경종을 울렸는데, 이제 종교에서 긍정적 가능성을 본 것이다. 이것을 '미국의 축복', 즉 아메리칸 그레이스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