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경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때에 그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창17장).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아버지가 될 언약을 새겨주셨고 사라에게는 민족의 어머니가 될 언약을 이름으로
새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이라는 큰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한 의인으로 살아
갈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대대손손 유지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언약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정체성
으로 분명히 받아들이며 살아왔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로마서4장에서 밝히는 내용,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언약하셨다는 것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이 언약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완전하게 살아갈까요.
그로부터 400년 후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상의 상속자될 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흠없어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올 약속된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외침입니다.
믿기만 하면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나가 휴식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합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 세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이 언약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의인, 구원, 진리, 생명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산좋고 물좋은 것 다 알지만 교회에 나와 하나님 존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고 그것을 얻고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적 자연적 사건들 속으로 달려가지 않고 구원을 찾아 나서게 되었을까요
그 답을 알 수 있는 성경구절이 신명기26장에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아브라함은 아람 땅 하란을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방랑생활을
하였고 이삭도 야곱도 그러했고 여호수아 때에 비로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랑부족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것이 이 언약관계의 시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그저 아브라함이 특별한 위치나 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으로 찾아오셔서 들려주신 말씀이 복,영원,나라,의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열심히 행동하시고 돌보심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세워진 것은 누가 전도하고 우리가 믿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전도한다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 가운데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된 것 뿐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아 이 한 세상을 방랑하며 학대와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불쌍하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오신 부터 우리는 구원과 생명과 복과 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남들과
다르고 구별된 삶으로 초청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언약의 성취를 온전히 누리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합니다. 율법은 분명히 거룩으로의 초대이건만 인간의 연약함과
부정함을 그곳에 이르지 못하여 결국 율법의 정죄아래 놓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모든 전통
과 관습과 법체제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잘 지켜가며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완전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 내어준바 되었고 우리는 아브
라함이 율법없던 때에 하나님을 믿었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자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마자 칭찬과 더불어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실망하여 책망하듯 예수님께 항변하였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아 하고 부르시고는 사탄의 일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대조될 때 그 사람의 일은 사탄의 것임을 예수님
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신에 사로잡힌 모든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부정한다면
결국 사탄의 소유로 전락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아서 만일 예수를 믿는다하면
서도 여전히 사람의 일에 대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사탄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죽음으로 내준바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직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 의인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희미하면
구원도 희미하고 믿음이 분명하고 구원도 분명합니다. 내 방랑하는 인생길에 분명하게
구원받는 길을 내 안에 사람의 일을 되도록 줄여나가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도록 훈련해
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이루고자 하는 죄책감보다 예수께 내 삶의 주권을 자꾸만
이양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께 우리 삶의 본좌를 내어드림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종된 나는 버리고 하나님의 일이신 예수를 모시어 들이며 사는 우리 모두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관련성구: 로마서4장13-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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